올해 2025년은 프랑스 대표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탄생 150주년으로 일년 내내 크고 작은 라벨 관련 콘서트가 계속 있습니다. 저도 3월 말에 여의도에서 하는 작은 콘서트에 갔었는데요. 라벨의 곡 중에서 대중에게 제일 잘 알려진 'Bolero, M.81'도 8 hands 편곡도 듣는 귀한 시간이었답니다. 이 곡이 뭔지 모르시겠다면 '디지몬 어드벤처'의 OST 볼레로라고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듣자마자 "아하!" 하실꺼에요.
다시 모리스 라벨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라벨은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의 대표 작곡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섬세하고 정교한 작곡 스타일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죠. 하지만 그는 드뷔시와 같이 인상주의 음악가로 불리기를 끔찍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라벨은 프랑스 신고전주의에 가까웠습니다.
À la manière de Borodine’(보로딘 풍으로)
라벨의 짧은 피아노 소품 중에 ‘À la manière de Borodine’(보로딘 풍으로)라는 짧은 왈츠곡이 있습니다. 제가 몇년전에 도전했던 정말 예쁜 곡인데요. '보로딘 왈츠'라고도 하는 곡은 단순한 모방을 뛰어넘은 동시대 선배 작곡가인 보로딘(Alexander Borodin)에 대한 라벨의 존경과 해석의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라벨은 이 곡을 통해 러시아 작곡가 보로딘의 음악 스타일을 자신의 언어로 흡수하고 재구성해서 창작해 냈습니다. 오늘 글에서는 이 곡의 음악적 구조, 작곡기법, 그리고 라벨이 어떻게 보로딘의 감성과 스타일을 해석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해 보았습니다.
오마주(Hommage)란 무엇인가: 음악에서의 존경과 재창조
라벨의 ‘À la manière de Borodine’은 ‘오마주'라는 예술적 개념을 대표적으로 구현한 작품입니다. 오마주란 한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의 작품, 스타일, 혹은 인물 그 자체에 대해 존경을 담아 창작하는 형식을 말하는데요. 이는 단순한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자신만의 언어로 상대의 특성을 흡수해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예술적 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에서 오마주는 흔히 작곡가가 동시대 혹은 과거의 음악가를 기리기 위해 그들의 스타일을 인용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라벨은 1913년쯤, 친구인 작가 헨리 가이옹(Henri Ghéon)의 요청으로 두 곡의 오마주를 작곡하는데, 하나는 보로딘 풍으로, 다른 하나는 샤브리에 풍으로 만든 곡이었다. 이 두 곡 모두 단순한 작법적 실험이 아니라, 라벨이 각 작곡가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보로딘은 러시아 민족주의 작곡가로서 독창적인 선율 감각과 민속적인 요소를 통합하는 음악가였습니다. 라벨은 그의 음악적 특징인 리듬의 다양성, 선율의 장식성, 조성의 유연함 등을 섬세하게 포착해 오마주 곡에 녹여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라벨은 단순한 스타일의 복제가 아닌, 자신과 타 작곡가 간의 음악적 소통을 구현했습니다.
“드뷔시는 자유롭고 더 로맨틱한 면이 있죠. 라벨은 드뷔시보다 지적이고, 완벽주의자로서 자신이 원하는걸 분명히 알았던 것 같아요.” - 피아니스트 조성진
보로딘 스타일의 핵심: 리듬, 멜로디, 조성의 융합
보로딘은 러시아 국민악파의 일원으로서 민족성을 띤 선율과 강한 리듬감, 자유로운 화성 전개가 특징적인 작곡가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오페라 '이고르 공', 교향곡 (특히 교향곡 2번 B단조), 현악 사중주 등을 살펴보면 이러한 특성들이 여실히 보입니다. 특히 보로딘은 전통적인 서유럽식 형식을 따르기보다는 자유롭고 민속적인 리듬과 선율을 구사했습니다. ‘À la manière de Borodine’에서도 라벨은 이러한 요소를 완벽히 보여줍니다. 곡 전체에서 러시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장식적 선율, 자유로운 리듬 전개, 그리고 다소 불안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조성의 변화는 보로딘의 음악 언어를 오롯이 드러내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요소들이 단순히 표면적인 흉내내기에 그치지 않고, 라벨의 섬세한 구조 안에서 절묘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곡은 비대칭적인 프레이징과 다소 낯선 박자 구성을 통해 러시아 민속 무곡의 느낌을 주면서도, 화성적 진행은 라벨 특유의 투명하고 정제된 어법으로 처리되어 있습니다. 라벨은 보로딘의 스타일을 해체한 뒤,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립함으로써 새로운 음악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라벨이 단순히 보로딘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보로딘이라는 작곡가의 핵심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자신의 창작 언어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타일의 재창조: 라벨의 작곡기법과 미학
라벨은 자신이 존경하는 작곡가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새로운 창작물로 승화시키는 재능을 지닌 작곡가였습니다. ‘À la manière de Borodine’은 그 대표적인 예로, 그는 이 곡에서 세심한 화성 진행, 선율 구성, 구조적 배열을 통해 오마주 이상의 가치를 지닌 음악을 창출해 냈습니다. 라벨은 자신이 보로딘에게서 차용한 요소들을 기계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전체적인 흐름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시킵니다. 예를 들어, 곡의 도입부에서는 마치 러시아 민속 선율을 연상케 하는 장식적이고 장중한 테마가 등장하며, 이는 다양한 변주와 리듬 변화 속에서 점차 라벨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로 변모해 가죠. 또한 라벨은 ‘스타일화’ 기법을 활용해 보로딘의 음악 언어를 재해석했습니다. 즉, 보로딘의 음악적 DNA를 해체하고 그 본질만을 추출한 뒤, 이를 자신의 조형적 미학 속에 투영시키는 방식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라벨은 과거의 양식을 흉내 내면서도, 더 나아가 과거를 통해 현재의 예술을 다시 써 내려가는 창작자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이 곡은 라벨의 곡 중 길이는 짧지만, 창작의 깊이와 사유의 폭은 그 어떤 대작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의 창작이라는 것이 단순히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수많은 예술적 교류와 영향을 통해 형성됩니다.
‘À la manière de Borodine’은 단순한 오마주곡을 넘어, 음악적 상호작용과 창작의 본질을 탐구한 작품입니다. 라벨은 보로딘의 스타일을 단순히 모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함으로써 예술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이러한 모방으로부터의 창작 기법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됩니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이지 않을까요? 이처럼 다양한 작곡가 간의 창작적 대화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도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음악을 들으시면서 다양한 작곡가 간의 대화를 듣고 나눠보세요.
공연소식
조성진의 '보로딘 풍으로'를 6월에 예술의 전당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조성진 피아노 리사이틀: 2025년 6월 14일(토) 17:00, 6월 17일(화) 19:30. 장소: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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